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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고은별

<한 줄도 나는 베끼지 않았다>, 몽골 시인 바오긴 락그와수렌




다른 이의 마음과 피가 배인 아름다운 시에서 한 줄도 베끼지 않았다는 정직한 시인이 있습니다. 몽골 최고의 서정시인 바오긴 락그와수렌입니다. 시인은 드넓은 몽골의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는 화가의 길을 걷다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처녀작 <가을 달>부터 시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첫 시집 <서정의 궤도>로 몽골을 대표하는 3대 시인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똑같은 삶을 산다면, 누군가와 똑같은 시를 쓴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 살아 있으되, 죽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 살아 있지만 좋지 않은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생명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다.”


락그와수렌의 시를 읊으며 ‘어머니 초원 위에 쓴 바람과 태양, 달, 서정의 하모니’*를 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선가 가슴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와 드넓은 몽골 초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지도 모를 일입니다.

     

     

2점

     

3교시 쉬는 시간

선생님께서 날 부르셨다

슬프거나 기쁜 일 어느 하나로

선생님께서 날 부르셨을 거다

두려움, 주저, 그림자가

내 뒤를 따라왔다

교무실 문의

열쇠 구멍 안을 엿보니

선생님께선 혼자 앉아

공책을 검토하고 계신다

말이 어눌한 나이였던지라

곧바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가 꼬리를 추켜올리고 뛰는 한창 더위에

송아지 꼬리를 잡고

넘어지지 않는 작은 ‘힘’에 우쭐해할 때

아버지께서 풀을 찾아 가축을 몰고 멀리 가시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던 밤

집에서 ‘용기’ 있게 지냈던 일이 생각나자마자, 난

“선생님, 들어가도 돼요?”라고 했다

“들어오너라, 락그수와렌!”

     

선생님께선 잠시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셨다

그 눈은 ‘잘못한 게 있지’하고 말한다

잘못이 있다면 모두 말해 버리고 싶었다

말수가 적으신 선생님께서는

눈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작나무* 장작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은

분명 뭔가 한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었다...

허름한 내 공책을 펼치시더니

“이 생각은 다른 사람 글에서 베낀 거지!!!

최소한 옳게 베껴 썼더라면...

너의 작은 주의력을 생각해서 중간 점수는 주었을 게다

다른 사람이 흘린 땀으로

자신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 거니?

‘2’점*을 준다!”라고 하셨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의 코브라 같은 2자가

공책에서 자꾸 고개를 들더니 붉은 무지개가 떴다

첫 아네모네의 예감을 실어 온 봄바람을 흐느끼게 하며

가방과 마음의 의욕이 온통 젖도록 울었다, 난

학창 시절 그 어리숙한 실수를

잠깐 지나가 버린 세월 앞에서

용서하세요! 저를... 선생님!

다른 이의 마음과

피가 배인 아름다운 시에서

한 연을 물론이거니와

한 줄도 베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안나 역자의 글 제목에서 따옴 작나무: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 *2점은 예전에 성적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

     

문학비평가인 호르로긴 샘필덴데브는 젊은 시인이 처녀작으로 시단에 선구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다른 작가를 모방한 처녀작으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 주면서 나름대로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락그와수렌은 첫 번째 작품으로 천재성을 지닌 특별한 시인임을 보여 주었다고 평합니다. 그의 시들은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롭게 개척했으며, 독특한 문학적 상상력과 선명하고 탁월한 묘사로 1980년대 시적 긴장이 없던 시대에 시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도르지팔라민 소미야 시인은 락그와수렌 시 창작의 새로운 특징을 언어적 의미 관계를 새로이 개척하고, 거의 모든 시마다 몽골 생활과 풍속을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시 한 편마다 하나의 완결된 서사적 줄거리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을 달

     

흰 서릿발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 부는 밤

달이 대지를 비추며 여기저기서 밤을 지냈다

건초 더미 옆에 고인

갑자기 퍼부은 빗물 고인 웅덩이에서 밤을 지냈다

누런색이 밴 흰 게르 안측으로

쑥 들어와 이리저리 배회하며 밤을 지냈다

세 번 찬물을 부어 증류한 순도 높은 소주 냄새에 비틀거리며

서른세 개* 오아시스에 크게 취해 밤을 지냈다

*고비의 모든 오아시스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수

     

     

몽골의 서부 지역 사람들은 신령한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어 아침, 저녁으로 가축의 젖이나 차를 뿌려 올리며 자신들의 삶을 지켜달라고 기원한다고 합니다. 깊은 밤에 하얀 게르 위로 달이 떠오르는 드넓은 초원의 풍경은 한 폭의 영원의 그림처럼 느껴지는데, 그 하얀 달이 초원에 내려와 잠을 자는 듯 보이기도 한다는군요. 바오긴 락그와수렌이 열여덟 살에 처음 발표한 <가을 달>은 이렇게 대지에 내려와 밤을 지내는 가을 달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고 시를 번역한 이안나 교수는 말합니다.

     

     

몽골 대초원

     

태양 태양이 비추는 돌들이

투구 모양이 되어 놀고

가을 가을 풀이

활 모양이 되어 노는

몽골의 드넓은 초원

     

두루미가 돌아가고 호수의 아픔이

가시지 않고 있을 때

맞았던 땅에 행운이 더하여

자식이 재롱을 부리는 초원

     

꽃이 밤하늘을 간지럽힐 때

초원에 내린 별들을 곱게 쳐서 빛에 섞는

새벽이 밝아 오는 초원...

     

고비의 개밀이 뽑히도록 휘몰아치는 바람

겨우 반을 넘고서 자만이 지치는

바람이 지치는 초원...

     

토끼 새끼 달이 구름을 뛰어넘어 미끄러지고

기진맥진해 도중에 밤을 지내며 창백해지는

달이 눕는 초원...

     

야생 암낙타가 누워 있다 일어나면

하르간* 가지 끝에 우름이 딱딱하게 굳어 남는

가축의 젖이 떨어지는 초원...

     

사내아이 후손에게 왕의 피가 돌아와

눈물의 한을 풀고, 다시 자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영혼이 돌아가는 초원...

     

델*이 커지도록 성조 칭기즈의 몸이 작아져

세상 앞에 굽혀 보지 않았던 무릎을 구부려 절한

왕이 무릎을 꿇는 초원...

     

다른 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이 대초원을

다리를 뻗어 차고 태어난 후손을

신까지 질투하는

고귀한 여인이 몸을 풀어 자식을 낳는 초원...

     

태양 태양에 빛나는 돌들이

투구 모양이 되어 놀고

가을 가을 풀이

활 모양이 되어 노는

몽골의 대초원

     

*하르간- 몽골 초원에서 자라는 관목

* 델- 몽골의 전통 의상

     


몽골은 드넓은 초원뿐만 아니라 울창한 숲과 높은 산,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 등 다양한 자연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특히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제가 방문했던 울란바토르에서는 뿌연 모래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몽골인의 정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하는데 시인이 한국에 왔을 때 “온몸에 스며드는 몽골의 바람 없이 난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한 것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이 바람이 몽골 사람들에게 특히 락그와수렌 시인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꽃 묵주

     

어머니

당신의

희디흰 대리석 발 앞에

꽃을 놓아 드리려고

꽃을 땄습니다

     

당신의

고우신 마음을 발견하곤 했던 청금석같이 푸른 초원

호오의 차별 없이 그늘을 드리워 주는 구름 그림자 아래

인적 없는 곳에서 제 노래를 듣습니다

     

응석받이 철부지가 푸른 개울가에서

꽃을 땄습니다

울면서 땄습니다

떨어진 회한의 눈물

눈물이 뚝뚝 떨어진 꽃들을 모두 땄습니다

     

당신에게 꽃을 깔아 드리려 하니

한여름 꽃은 말할 것도 없고

백 년의 꽃으로도 자라지 않습니다

     

고우신 어머니

관자놀이에 서리가 내리지 않으신 어머니

당신이

세상의 순리, 영원의 밤 속으로

떠나신다고 울었습니다

별들이 날아갈 듯한 죽음의 검은 폭풍 속에서

추위에 떠신다고 눈물 흘렸습니다

     

당신이

수천 개 뿌리 끝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자란다고 안심했습니다

평화로운 새벽 흠 없이 하얀 새벽별이 있어

시작되는 모든 것의 선봉에서 빛난다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이별로 화석화된 가락

따스한 채로 굳은 가축의 젖

어머니 전 당신의

연속입니다

     

     

락그와수렌 시인은 시를 쓰는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노래와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하루 이틀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워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어린 시절 항상 아파서 자리에 누워 계셨던 어머니를 걱정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편찮으신 어머니의 창백한 베개 옆에서 밤낮을 연민의 끈에 묶여 그 많은 놀이를 거절하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기에 내게는 어린 시절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자연이며 생명이며 시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 

     

내가 죽어-사람들이 나를 잊을 때

그림자로 빛을 깨고

내 무덤에 한번 오라

내 영혼이 당신을 알아보리니

     

모든 망각의 끝에

잊지 않고 남아 있던 당신에게

자욱이 내린 안개가 즐거워하고

발에 걸린 돌이 즐거워하리니

     

이별에 흐려진 풀이

아파하다 기뻐하며

옆에 눈먼 산들이

내려다보며 기뻐하리니

     

사랑했노라 진정으로...라고

가장 마지막 내 뼈들이 모여 외치리라

     

     

 2019년 2월 5일, 몽골의 바람과 같은 시인 바오긴 락그와수렌(Bavuugiin Lhagvasuren)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안겼겠지요.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그 영혼은 빛이 되어 저 하늘 멀리 광대한 우주로 날아가 푸른빛을 발하는 고고(高高)한 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줄도 나는 베끼지 않았다

문학의 숲, 2013년 2월 10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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